철도박물관 선정, 한국철도 7가지 유산 속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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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박물관 선정, 한국철도 7가지 유산 속 역사
  • 레일앤뉴스
  • 승인 2023.06.28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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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6월 28일 ‘철도의 날’ 기념

6월 28일, 철도의 날

우리나라 최초 철도국 창설일 1894년 6월 28일 기려, 2018년 새롭게 개정

 

‘철도의 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국 설립일인 1894년 6월 28일을 기념한 것이다. 일본이 건설한 경인선 개통일인 기존 철도의 날(9월 18일)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우리 스스로 철도를 놓으려 했던 자주적 의지에서 철도의 효시를 찾자는 취지로 2018년 5월 8일 개정되었다.

철도의 날 개정 연혁 (출처 : 국가기록원)

1894년 6월 28일(음) 공무아문 산하 철도국 창설

1899년 9월 18일      경인선(노량진~제물포)개통, 33.2km

1937년                  ‘철도기념일’ 선포

2016년 10월 31일    ‘철도의 날’ 개정 촉구 결의안 발의

2018년 5월 8일       제20회 국무회의 ‘철도의 날’ 의결

2018년 6월 28일      개정된 첫 ‘철도의 날’

 

철도박물관에서 선정한 ‘한국철도의 7가지 유산 속 역사’

 

철도의 날은

국가기간 교통수단으로써 철도의 의의를 높이고 종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1964년부터 ‘철도의 날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992호)’에 따라 기념일로 지정됐다. 철도의 날을 맞아 국내 유일의 철도박물관(관장 배은선)과 함께 우리 철도의 7가지 유산과 거기에 담긴 역사를 정리했다.

 

철도박물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은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전당이다. 국내 유일의 철도관련 1종 전문박물관으로 해마다 15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실내 전시관은 2,509㎡의 2층 규모로, 철도의 역사를 담고 있는 문서, 소품 및 각종 철도모형과 차량·전기·시설·운수용품 등 약 2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장은 약 23,000㎡의 면적에 실제 운행되었던 철도차량 및 철도보수장비 등 총 41점의 대형 유물들이 있다.

 

철도박물관 선정 한국철도 7가지 유산 속 역사

➀ 한국형 고속철도 시제차량 ‘HSR350X’

HSR-350X는 국산화를 이룬 고속차량의 모태가 되었고 고속철도 도입과정과 기술축적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➁ ‘서울을 대중교통의 허브로’ ‘첫번째 수도권전철 1001호 차량’

1974년 8월 15일 개통된 수도권전철과 서울지하철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대중교통을 대표하는 시민의 발로 자리 잡았다. 수도권전철 시대를 연 전철차량 1001호와 수도권발전의 역사를 알아보자.

➂ 한 세기 대한민국 수도의 관문이었던 ‘옛 서울역사’

1925년 지어진 서울역사는 가장 오래된 국내 철도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광복의 영광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다. 격동의 흔적을 이겨낸 서울역사는 우리나라 역사를 온몸으로 품고 있다.

➃ 하루 3천5백여대 열차를 컨트롤하는 ‘철도교통관제센터’

전국 4,131km 선로, 모든 열차를 감시하는 열차 관제업무시설인 철도교통관제센터는 열차 이동 중 모든 과정을 샅샅이 모니터링하며 이례상황에 대비한 비상대응 핵심 기능도 갖추고 있다.

➄ 국내 가장 오래된 철도시설 ‘1897년 경인철도 레일’

국내 가장 오래된 철도 레일은 철도박물관에 보관된 경인철도 부설 당시 레일이다. 1935년 철도박물관 개관 당시 수집된 유물로 추정되며 ‘철도 시설물로서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➅ 국내 최초의 철도사진 자료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19세기 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사진인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은 철도 부설 당시의 사연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 세기 넘게 숨겨졌던 사진 속 비밀이 최근 연구에서 풀리고 있다.

➆ 전 국민이 애용하는 열차 승차권 앱 ‘코레일톡’

다운로드 3천만 건에 이르는 코레일톡은 전체 승차권 발권량의 80%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두꺼운 종이에서 ‘e-티켓’까지 기술발전과 같이 해온 열차승차권은 현재도 진화하고 있다.

 

<한국철도의 유산 1.HSR350X>

한국형 고속철도 시제차량 ‘HSR350X’

2004년 352.4km/h 돌파, 고속철도차량 국산화의 밑거름 된 시험 모델

2004년 개통한 KTX는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잇고, 국토 균형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KTX급 속도혁명’ ‘KTX 수혜지역’ 등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KTX(Korea Train eXpress)는 고속철도를 대표하며 대한민국 산하를 누비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고속철도차량은 KTX가 46편성, KTX-산천이 61편성(SR 임대한 KTX-호남 22편성 포함), KTX-이음이 19편성이다. 경부선, 호남선, 중앙선 등 전국을 달리는 총 126편성의 고속차량,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차량이 존재하는데 바로 HSR-350X(High Speed Rolling stock 350km/h eXperiment)다.

<차량기지 내에 세워져있던 HSR-350X>

HSR-350X는 국산화를 이룬 고속차량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와 함께 고속철도 도입과정과 기술축적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1994년 6월 프랑스 알스톰사가 우리나라에 고속철도기술을 전해줄 업체로 선정된다. 테제베(TGV)를 운영하는 알스톰은 1998년 현지에서 직접 2편성을 제작하여 국내에 들어온다. 이후 10편성은 골격과 부품을 국내에 들여와 조립하여 2002년 국내에서 제작한 첫 번째 KTX가 등장했다. 핵심기술은 알스톰이 보유하고 있어 국산화율은 58% 정도였지만 점차 고속철도차량 제작 기술력을 높여갔다.

<KTX>

그렇게 자체 기술을 쌓아가며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고속철도 시제 차량이 HSR-350X이다. G7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한 HSR-350X.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G7) 수준으로 진입시킨다는 목표 아래 범정부적으로 추진한 선도 기술개발 사업인 G7의 일환으로 한국형 고속철도차량 기술개발사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96년부터 6년 간 추진해온 사업의 성과물로 7량 1편성의 한국형고속철도 시제차량 HSR-350X가 탄생했다.

2002년 시운전에 들어갈 당시엔 100km/h 안팎의 속도만을 냈다. 고속철도시스템은 차량의 성능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로를 포함한 궤도 전차선, 신호, 통신, 보안 등의 첨단기술이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념행사까지 준비한 300km/h 돌파 시연 당일에는 충전 배터리 고장으로 다시 수리 후 운행해야 했다.

결국 2004년 12월 16일 천안-신탄진 사이에서 352.4km/h를 달성했다. 350km/h라는 목표 속도에 도달한 이후에는 진동, 소음, 승차감 개선 등의 성능 안정화에 주력하고 자체 신기술을 접목시켰다. HSR-350X는 KTX의 모방이 아니었다. 기초부터 새로 만들었다.

알스톰사의 고속철도 기술 이전 항목에는 모터 등의 핵심기술이 포함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부품 제작 기술 없이는 향후 해외수출의 길도 막혀 자체기술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시제차량을 통해 고속철도차량 국산화를 시도한 이유이다. HSR-350X는 실제 영업운행에 나서지는 않고, 2007년 말 20만 킬로미터의 시험운전을 모두 마친 후 역할을 마감했다.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HSR-350X는 오송차량기지에 한동안 세워져있었다. 경부고속선 오송역 인근을 지날 때 울타리 건너 야외선로에서 볼 수 있었다. 정부의 차량 소유권이 소멸되고 폐차 계획이었으나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의왕시 등에서 보존하기로 한다. 7량을 3량, 2량, 1량, 1량으로 나눠 경기도 의왕시 의왕레일파크,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의왕역 유휴녹지선, 경기도 여주시에 각각 보존하고 있다.

<의왕시 의왕레일파크에 휴게공간으로 전시된 HSR-350X>

HSR-350X가 성실히 임무를 마친 1년 후 2008년 11월 25일, 한국형 고속철도차량이 태어났다. 향후 대국민 공모를 통해 KTX-산천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KTX-산천의 탄생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네 번째의 고속철도 기술보유국이 되었다. 1991년 일본과 프랑스, 독일에 고속차량 기종선정을 위한 제의요청서를 보낸 지 17년 만의 쾌거다.

<세계 네 번째로 자체 고속철도 기술로 만든 KTX-산천>

HSR-350X는 애초에 시제차량으로 만들어졌다. 영업운행을 목표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상업운전에 투입될 고속차량을 제작하기 위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차량 차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시험의 결정체가 바로 KTX-산천이었다.

2012년 5월 HSR-350X의 후속으로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해무(HEMU)-430X(Highspeed Electric Multiple Unit - 430km/h eXperiment)를 공개했다. 최고속도 430km/h로 달릴 수 있게 설계된 시제차량으로 2012년 12월 17일 401.4km 증속시험에 성공했다. 해무에 적용된 동력분산식 기술은 이후 KTX-이음 제작에 사용되었다.

KTX-산천과는 전혀 다른 동력방식의 ‘KTX-이음’이 만들어진 것은 2020년 말이다. 국내 기술로 탄생한 최초의 ‘동력분산식’ 고속차량이다. 앞뒤에 동력차가 있는 동력집중식의 KTX나 KTX-산천과 달리 칸칸마다 동력과 제동장치가 있다. 출발하고 멈출 때 시간이 짧아 역간 거리가 외국보다 좁은 한국 선로의 특성과 터널‧교량이 많은 국내 지형에 적합하다. 한국형 차세대 고속열차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또한, 좌석 효율성과 가감속력이 뛰어나 우리나라 사람의 체형과 지형적 특성에 최적화되었다.

<동력분산식 고속열차 KTX-이음>

한편, 2004년 개통 첫해 약 7만3천명에 불과했던 고속철도 하루 이용인원은 현재(‘23년 6월 기준)약 23여만 명까지 늘어 3배 이상 증가했다. 고속철도 정차역 중심으로 인구도 증가했다. 천안아산역에 고속열차가 정차하며 인근 아산시 인구는 2004년 21만여 명에서 34만여 명으로 60% 가량 증가했다. 고속열차 정차역은 역세권의 발달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광명역, 오송역, 동대구역은 고속철도가 지역발전을 이끈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험 주행 당시 HSR-350X>

<한국철도의 유산 2. 수도권전철 1001호>

‘서울을 대중교통의 허브로’ ‘첫번째 수도권전철 1001호 차량’

수도권전철 시대의 선봉…도시 발전과 인구분산에도 앞장

최초로 수도권전철과 지하철에 투입된 전철차량은 차량 자체보다는 대한민국의 수도권전철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흔히 지하철로 익숙하게 부르지만 ‘지하’ 외에 ‘지상’ 구간도 많이 달리기에 ‘도시철도’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특히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코레일의 ‘광역철도’는 이해하기 쉽게 구분해 ‘수도권전철’이라 부른다.

<수도권전철 개통 당시>

수도권전철의 효시는 1974년 최초로 운행을 시작한 1001호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첫번째 편성 중 선두차량이다.

1960년대까지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은 전차였다. 버스보다 우리나라에 먼저 도입된 전차는 20세기 초 노면 위에서 달리는 대표 대중교통이었다. 이후 1968년 서울 시내 전차가 차량의 노후화와 누적 적자로 폐지됐다. 자동차와 도로를 동시에 점유하는 점과 잦은 고장도 원인이었다. 이후 시내버스와 택시 등의 도로교통수단에 의지했지만 이마저도 도로가 포화되어 수도권전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1970년 정부는 수도권전철과 서울 지하철 1호선 계획을 발표한다. 이듬해 공사를 착공하고 4년여 후 1974년 8월 15일 수도권전철(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며 경부선(서울-수원), 경인선(구로-인천), 경원선(청량리-광운대) 3개 노선에서 29개역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수도권전철이 개통되고 운행한 열차가 1001호이다. 일본 니혼사료에서 제작한 차량으로 완성된 형태로 국내에 도입되었다. 초창기 6량(칸)이 1편성이 되어 열차 당 좌석 312명, 입석 624명, 합계 정원이 936명이었다. 러시아워에는 최대 2,200여 명까지 수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1970년대 후반 수도권전철을 이용하는 시민들>

1편성 당 6량(칸)에서 8량(칸)으로, 8량(칸)에서 다시 10량(칸)으로 늘려 수송력을 높였다. 운행 간격도 초기 20분에서 12분, 8분, 6분으로 계속 줄여 나갔다. 수도권 시민의 발로서의 임무를 맡던 1001호 차량 기종은 2000년 12월까지 운행을 하고 역할을 마친다.

현재는 철도박물관에서 1량을 전시하고 있으며, 서울교통공사에서는 첫 번째 편성 전체 6량(칸), 101호 편성을 차량기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철도박물관에 전시된 수도권전철 1001호>

1977년 수도권전철 국산화 사업으로 대우중공업(주)에서 제작된 1115호가 만들어져 같은 시기에 운행되었다. 1980년대에는 현대차량(주)도 뛰어들어 차량 제작과 수주의 경쟁체제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수도권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 도시철도가 들어서며 철도차량의 기술도 고도화되고 완전 국산화로 자립할 수 있었다. 현재 코레일과 도시철도가 보유해 운행하고 있는 전동차는 약 9천여 대에 이른다.

<개통 당시 서울지하철 101호>

<개통 후 새로 도색한 수도권전철>

현재 하루 300여만 명이 이용하는 수도권전철은 동해선, 서해선을 포함한 전국 광역전철 구간에서 총 15개 노선 291개 역을 운행한다. 구간도 초기 74㎞에서 723.7㎞로 확장됐다. 연간 수송인원은 2천9백만 명에서 10억 명을 넘어서며 약 35배가 증가했고, 운행횟수는 215회에서 2,556회로 약 12배 늘었다. 도시 내 인구가 밀집되며 짧은 역간 거리에서는 최고 속도가 70~80km/h 정도이지만 수원 아래쪽으로는 넓은 역간 거리를 110km/h 속도로 달리기도 한다.

수도권전철 운행 효과로 선로를 따라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서울에 집중된 인구가 수도권으로 분산되며 전철역을 중심으로 역세권과 위성도시가 생겨났다. 역이 지역의 중심지가 되며 기능이 강화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유동인구를 소화하기 위해 연계교통 기능도 확대되고 상업지역은 더욱 커졌다. 사람이 몰리는 역세권은 더욱 고밀도로 개발하게 된다.

<현재 운행 중인 신형 수도권전철>

한편으로는 수도권전철이 사방으로 확대되며 서울로의 접근성을 확대해 서울의 인구를 분산시킨 측면도 있다. 한 예로 수도권전철 1호선이 지나는 지자체는 30여 곳이다. 경기도 전체 31개 시‧군 중에서 13곳을 지나고 있다. 향후에는 수도권 외곽에서 서울 도심의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GTX도 등장해 수도권전철과 환승하며 수송수요를 나눠가질 전망이다.

<한국철도의 유산 3. 옛 서울역사>

한 세기 대한민국 수도의 관문이었던 ‘옛 서울역사’

루체른 역사 본뜬 르네상스풍 양식…독립운동 등 살아있는 역사 현장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차역, 서울역은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2004년 등장했다. 이전까지 80년 가까이 대한민국 수도를 지킨 역은 서울역 광장 오른편에 있는 고풍스런 자태의 ‘옛 서울역사’이다.

<1925년 준공 당시 서울역>

대한민국 근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옛 서울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지어졌다. 가장 오래된 국내 철도건물이며 르네상스 궁전 양식의 형태와 비잔틴 양식의 돔, 첨탑 등의 고전적 요소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한때는 도쿄역과 비슷하다고 전해졌으나 경기대학교 안창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스위스의 루체른 역사를 모델로 한 것으로 드러났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된 본체와 3개의 타는곳, 2개의 노선교(과선교), 부속동 등으로 구성되었다. 건축 연면적은 17,269㎡(5,221평)이며 철근콘크리트조에 일부 철골과 돌‧벽돌‧콘크리트블록 등을 쌓아 올린 벽으로 공간이 구분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주공간인 중앙홀에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공간을 밝혀 근대 궁전의 분위기를 풍긴다. 오후 시간대 중앙홀을 비추는 비스듬한 태양광선이 건물 내부를 신비롭게 밝혀준다. 입구 위에 높이 설치된 시계가 오히려 비현실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천장을 통해 빛이 비추는 옛 서울역 중앙홀>

기차역답게 승객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승객 이용등급에 따라 3등 대합실, 1, 2등 대합실이 있다. 여성을 위한 부인 대합실과 귀빈 수행원을 위한 공간도 있어 당시 풍습을 엿볼 수 있다. 2층 내부에는 애초 이발소였던 자리를 현재는 복원실로 꾸며 건축부품과 부속물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귀빈실은 조선총독 등이 사용했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식 건물답게 최초의 것들이 건물 내부 곳곳에 들어섰다. 양식당 ‘서울역그릴’, ‘난방장치(라디에이터)’ 등도 이곳에 처음 설치되었다.

<1924년 개통되기 한해 전 옛 서울역>

1900년 한강철교 완공으로 경인철도가 경성역까지 완전 개통되자 용산역, 남대문역, 경성역이 새로 생겼는데, 지금의 서울역은 당시의 남대문역이었다. 경인철도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이기도 한 경성역은 한자로 京城(경성)으로 표기하고, 영문명은 ‘Seoul’로 함께 표기했다. 외국인이 철도를 많이 이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서울역 명칭 변경>

그런데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된 이후 남대문역의 입지가 강화되고 경성역은 역할이 축소되었다. 비중이 줄어든 역에 ‘경성’이라는 수도의 이름을 줄 수는 없었을 터. 그래서 1905년 3월 ‘경성’이라는 역명을 ‘서대문’으로 고쳤다. 그렇게 18년 간 ‘경성’이란 역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서대문역은 남대문역에 밀려 수송량이 계속 줄어들다가 1919년 3.1 만세운동의 집결지로 활용되자 폐지되었다. 1923년 1월, 존재감이 커진 남대문역은 경성역이란 이름을 얻게 되고, 1925년 새 역사가 준공된다.(경성역은 광복이후 1947년 11월에 비로소 서울역이 된다)

서울역은 건립 당시엔 일제의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본에서 부산-서울을 잇고 신의주까지 연결하는 한반도 종단 철도의 일환이었으며, 그 중심에 서울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부산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리는 열차도 서울을 경유해 운행하기도 했는데 군수품과 수탈 곡식 수송에 적지 않게 쓰였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도 1936년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를 타고 서울역을 거쳐 신의주, 만주를 통해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가 탔던 승차권에는 기차표와 배표가 합쳐진 ‘승차선권’이란 이름으로 출발 : 동경, 도착 : 베를린이 적혀있고, 부산, 하얼빈이 경유로 표시돼있다.

서울역 광장에는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의 동상도 서있다. 1919년 당시 예순네 살이었던 강우규 선생은 직접 폭탄을 들고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안타깝게 암살에 실패하고 붙잡혀 1년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 넋을 기리기 위해 그가 폭탄을 투척한 자리에 동상을 설치했다. 그 위치가 당시 남대문역이었던 지금의 역 광장이다.

서울역 직원의 독립운동 기록도 존재한다. 출납을 담당하는 역직원 박인환 등이 공금을 빼내서 잠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기부하기도 했다. 1926년 6월에는 ‘만주대동단선언서’의 격문 약 1만 장을 철도직원이 기차에 싣고 오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광복 후 ‘서울’로 이름을 찾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역사의 일부가 파괴되어 복구하기도 했다. 전후 1960년대는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과 수도로서의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해 본 역사 이외에 남부‧서부역을 새로 신설했다. 서부역은 현재 코레일의 서울본부가 사용하고 있으며 남부역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의 서울역이 들어섰다.

<한국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울역 구내>

서울역사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애환을 같이 겪었다. 처음 상경한 사람은 역 광장에서 압도적인 건물의 위용에 놀라움을 느꼈다. 때로는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향하는 사람의 발걸음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광복의 영광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으며 격동의 흔적을 함께 이겨낸 ‘서울역사’는 우리나라 역사를 온몸으로 품어 왔다.

<1950년 서울로 향하는 환도열차>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내려온 정부 관계자들과 피난민들이 1950년 10월 전쟁 후 수도로 향하는 ‘환도열차’에 올라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다.

<1980년대 추석 귀성열차를 기다리는 서울역 승객들>

옛 서울역사가 열차와 승객을 맞는 철도역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은 2003년 11월이다. 새로 지은 고속철도역사 ‘서울역’으로 역무시설을 이전해 바통을 터치한 것이다. 이듬해인 2004년 1월 1일 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준공행사를 하고 4월 1일 고속철도시대를 맞이했다.

<2004년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새로 지은 서울역>

고속철도 개통 이후 철도청은 옛 서울역사를 활용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여 원형보존 작업에 들어갔다. 철도청은 문화사업 등을 통한 수익창출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옛 서울역사가 사적 284호로 지정돼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문화재청의 협조가 없으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정부방침에 따라 철도청은 공기업인 한국철도공사로 전환되었다. 기존 철도청의 자산은 시설자산과 운영자산으로 나뉘어 시설자산은 국가가 소유하고 운영자산은 한국철도공사에 출자되었다. 대표적인 시설자산으로는 선로와 전차선, 터널 등이 있고, 운영자산으로는 역 건물, 차량, 차량기지 등이 있다.

초기에는 옛 서울역사는 운영자산으로 분류되어 한국철도공사에 출자되었다. 하지만 실제 철도운영에 사용하지 않는 문화재를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문화재보호법에 어긋나 국가에 반납할 것을 문화재청이 요구하고 관리 비용 부담 등의 이유로 서울역을 문화재청으로 넘기게 되었다.

2006년 7월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이후 이 건물은 복원작업을 거친 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위탁운영을 맡아왔다. 현재는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며 각종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준공 당시 서울역사>

<현재 전시공간으로 사용되는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

<고속철도와 함께 2004년부터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서울역>

 

 

<한국철도의 유산 4. 철도교통관제센터>

하루 3천5백여 대 열차를 컨트롤하는 ‘철도교통관제센터’

전국 4,131km 선로, 모든 열차 모니터링…이례상황 비상대응 핵심 기능도

평일 오후 2시, 전국 4,131km 선로 위에는 고속열차와 ITX-새마을 등의 일반열차 그리고 화물열차와 수도권전철까지 307대 열차가 달리고 있다. 경부고속선 영동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KTX, 시멘트를 싣고 오봉역으로 향하는 화물열차, 양수철교를 지나 강릉역으로 향하는 KTX-이음, 줄줄이 이어진 1호선 수도권전철까지... 사방으로 향해 전국 산하를 누비는 각양각색의 열차들이지만 모두가 한 화면에 표출되어 한곳에서 총괄 제어하고 있다. 열차운행의 컨트롤타워인 철도교통관제센터다.

2005년 건립된 철도교통관제센터는 국가로부터 위탁 받아 코레일에서 수행하는 열차 관제업무시설이다. 전국의 모든 열차운행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고 통제도 할 수 있다. 비행기 이착륙 체계를 총괄하는 공항의 관제탑과 같은 기능이지만 철도의 관제는 출발과 도착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 중 전 과정을 샅샅이 모니터링한다. 또 신호조작을 통한 운행에 대한 통제 역시도 가능하다.

<철도교통관제센터>

관제센터의 주요 업무는 운행열차의 집중 제어 및 통제, 선로 인근 공사와 관련된 승인‧통제‧조정 등의 업무이다. 전철‧전력‧통신 설비를 원격으로 제어하며 감시하기도 한다.

아울러, 철도사고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 컨트롤타워의 역할도 맡는다. 열차 내 응급환자 발생 시 인접역 정차나 119 긴급 구호를 받도록 도우며, 태풍으로 선로로 쓰러진 나무를 발견하면 해당 선로 열차 운행중지 명령도 내린다. 온도에 따른 서행이나 선로장애 시 다른 선로로 우회하는 지시도 이곳에서 결정한다.

철도사고로 장기간 복구 작업이 필요할 경우 기중기 투입, 복구재료 운반 등의 비상시 운행 정리 업무도 수행하고 열차가 운행하지 못하는 경우 버스 등의 대체교통수단의 투입도 지시할 수 있다.

관제센터에는 모든 열차의 운행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지만 전국의 모든 열차와 기관사를 홀로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역에는 관할 구간을 통과하는 열차를 통제하는 ‘로컬관제실’이 있다. ‘미니 관제센터’ 역할을 맡아 열차 출발‧서행‧정지 등의 신호등이 되기도 하며 관제센터와 열차 기관사 간의 매개체 역할도 한다.

<과거 5개 지역에서 나눠 맡던 관제업무>

관제센터가 등장하기 전에는 5개 지역에서 구역을 나눠 관제업무를 수행했다. 관할 구역을 이동하는 열차가 있으면 서로 인계인수하며 관리했다. 그러다 전체 열차 운행의 효율성과 유지보수 비용절감을 위해 일괄 통제 체제로 통합하게 됐다. 향후 제3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따라 2027년까지 신규 건설노선 수용 등을 위한 철도교통관제센터 증축공사가 오는 8월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과거 중앙선 관제설비>

<관제와 교신하는 역(‘69년)>

아울러, 국토교통부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충청북도 청주시에 오송 제2철도교통관제센터를 설립해 지진, 화재, 테러 등 비상상황에 정상가동이 가능한 이중화 설비시스템을 갖추는 한편, 기존 철도교통관제센터의 노후화와 용량포화에 대비한 시스템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기존 건물 옆에 증축될 철도교통관제센터 조감도>

 

 

<한국철도의 유산 5. 경인철도 레일>

국내 가장 오래된 철도시설 ‘1897년 경인철도 레일’

측면 돋을새김 글자로 생산기록 확인…레일 종류에 따라 특징도 각양각색

철도산업발전기본법에서 정의한 ‘철도’는 “여객 또는 화물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철도시설’과 철도차량 및 이와 관련된 운영‧지원체계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운송체계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도시설의 대표적인 설비가 궤도이며 궤도는 선로(레일)와 열차운행을 위한 선로 주변 시설들로 나뉜다.

철도의 정시성, 안전성, 대량수송성 등의 특징은 열차가 선로 위에서 달리기 때문에 생긴다. 도로나 항공 교통과 구분되는 철도의 기본 특징이 바로 선로다. 선로와 레일(Rail)은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선로의 범위가 더 넓다. 고유명칭으로 규격과 특징설명에는 레일이란 용어를 통상 사용한다.

<철도박물관에 전시된 경인철도 부설 당시 레일>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철도 레일은 철도박물관에 보관된 1m 길이의 경인철도 부설 당시 레일이다. 1935년 철도박물관 개관 당시 수집된 유물로 추정되며 ‘철도 시설물로서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당시만 해도 경인철도 부설에 쓰인 레일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겠지만 현재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레일에도 지문처럼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가 있으며 경인철도 레일 측면에도 돋을새김 글자로 생산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레일 생산기록을 나타내는 돋을새김 글씨>

“600 ILLINOIS STEEL Co SOUTH WKS Ⅸ 1897”

1. 먼저 “600”이란 60파운드, 즉 27.21kg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야드당 무게를 말한다. 우리나라 철도에서는 레일의 규격을 1미터당 무게로 따진다. 따라서 이것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9.76kg/m, 약 30kg에 해당한다.

2. “ILLINOIS STEEL Co”란 이 레일의 제작회사가 일리노이 철강회사라는 것을 뜻한다. 일리노이 주는 미국의 대형 철도회사인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가 있는 곳이다. 현재도 철도박물관(IRM)이 유명하며 중서부의 철도 역사가 잘 보존되어 있다.

3. ‘SOUTH WKS’란 ‘남쪽 공장’을 뜻한다.

4. ‘Ⅸ 1897’란 이 레일이 1897년 9월에 제작됐다는 뜻이다.

종합하면 1897년 9월 미국의 일리노이 철강회사 남공장에서 제작한 미터당 30kg 규격의 레일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실제 철도박물관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미터당 무게는 25kg에 불과했다. 부족한 5kg에 대한 연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공장에서 생산할 때 제작회사와 제작연월을 돋을새김 하는 것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철도창설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레일의 표준 길이는 10m였다. 기술이 늘며 1936년 이후부터 20m로 바뀌었다. 현재는 25m가 표준인데, 이를 정척(定尺)레일이라고 한다. 이보다 짧은 것은 단척(短尺)레일, 50~200m의 것은 장척(長尺)레일, 200m 이상부터는 장대(長大)레일이라고 부른다.

규격이 정해진 레일은 용접을 해서 화학적으로 연결하기도 하고 ‘이음매’라는 결속장치로 물리적으로 결속시키기도 한다. 무궁화호 등 일반열차가 달릴 때 주기적으로 들리는 “덜거덕덜거덕” 소리와 진동은 기차바퀴가 이음매를 지날 때 나는 소리이다. 가급적 이음매를 없애는 방향으로 발전해와 고속철도는 전 구간에 이음매가 없다. (일반철도 구간을 지나거나 교량이나 분기기의 ‘신축이음매’라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

기본적인 레일 분류는 무게에 따른다. 현재 사용되는 레일은 1m당 무게를 기준으로 37kg/m, 50kg/m, 60kg/m 세 종류가 있다. 고속철도 구간은 모두 60kg/m이며 일반선의 경우 50kg/m, 60kg/m 레일을 같이 사용한다. 선로가 나뉘는 분기부의 경우 60kg/m를 주로 사용한다.

60kg/m 레일과 50kg/m 레일

고중량의 선로의 경우 안정성이 높고 변형도 낮지만 유지보수에 더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열차가 주로 달리는 ‘본선로’는 60kg/m로 개량하고 있는 중이다. 37kg/m 선로는 본선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측선 일부에 남아있는 정도이다. 국내에 부설된 전체 선로 중 56% 가량은 60kg/m, 43% 가량이 50kg/m, 37kg/m 선로는 0.1% 미만이다.

레일과 레일 사이의 간격을 궤간이라고 한다. 평행한 두 레일 사이 가장 짧은 거리를 말하며 레일 머리 부분 위로부터 14mm 아래 지점을 기준으로 한다. 세계적으로 정한 국제표준궤간은 1,435mm이며, 이보다 좁으면 협궤(狹軌), 넓어지면 광궤(廣軌)라고 부른다.

1,435mm라고 하는 특정한 수치가 어떻게 국제규격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설이 있다. 기차가 도입되기 전에 운행하던 마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철도가 처음 시작될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쌍두마차였다. 전통적으로 그 마차 바퀴의 폭이 4피트 8½인치, 곧 1,435mm이었다.

이 규격은 로마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로마시대의 도로 폭에 대해 기원전 450년경 12표법에서는 도로 폭을 직선구간에서는 2.45m로, 곡선구간에서는 4.9m로 규정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1825년 철도가 처음 상업운행을 시작했을 때 기차가 다니지 않는 시간대에는 말이 끄는 역마차가 다녔고, 이것은 쌍두마차의 바퀴 폭과 철도 궤간의 관련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이다.

궤간에 맞춰 차량규격이 정해지고 터널이며 역사, 타는곳의 크기도 정해지기에 표준 기준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표준궤간을 사용하고 일본의 경우 일반선은 협궤인 1,067mm, 고속열차인 신칸센은 표준궤간을 사용하고 있다. 1,520mm 광궤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러시아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는 궤간이 762mm에 불과한 협궤노선이 두 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수원에서 여주까지 연결된 수려선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최근 광역전철이 놓인 수인선으로 수원에서 인천까지 연결된 노선이다. 수려선은 1972년에 폐선되었고 수인선은 그 후 20여년이 지난 1995년에 폐선되었다.

우리나라 철도의 궤간과 관련한 주요 기록으로는 1896년 7월 15일자(음력) 칙령 제31호로 제정 공포한 국내철도규칙을 들 수 있다. 이때 우리나라 철도의 궤간을 표준궤간인 1,435mm(영척 4척 8촌 반)로 정했다. 이 궤간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광궤로 바뀌었지만, 원래대로 표준궤간을 채택하게 되었다.

<터널 속 레일>

<200m 장대레일>

 

 

<한국철도의 유산 6.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국내 최초 철도 사진 자료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대한민국 근대사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장면

지난 6월 7일 충청북도 청주시 문화제조창 일원에서 열린 ‘평택-오송 고속철도 2복선화 착공 기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해 지방시대 개막을 위한 교통 인프라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고속열차 운행을 2배로 늘려 전국 2시간대 생활권을 확대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는 ’춘천-속초 철도착공 기념식에도 나서 “동서고속화철도 등 촘촘한 교통망으로 강원지역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기대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비단 윤 대통령뿐만 아니라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철도 관련한 주요 행사에 참석해 교통망 확충과 지역 균형개발에 대한 국가적 전망을 내비치곤 했다. 착공식에 오느냐 또는 기공‧준공식에 참석하느냐, 개통이나 영업개시 행사장을 찾느냐에 따라 행사의 무게가 달라진다. 출발역과 도착역 등 찾는 장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국가원수가 참석한 철도 행사를 담은 사진 한 장은 그 이상의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 우리나라 철도 최초의 사진인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은 오랜 시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진은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현(쇠뿔고개)에서 열린 경인철도 기공식 때 찍은 것이다. 이 나라 철도 최초의 사진이자 우리 철도인이 맨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등장인물은 대략 60명. 눈에 띄는 다섯 명의 서양인이 왼편에 있고, 중앙에는 조선의 양반들이 10여 명 보인다.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삽을 들고 오른편에 서있다. 뒤에는 귀빈 경호를 맡았을 군인들이 보인다.

사진이 찍힌 날로부터 약 1년 전인 1896년 3월 29일,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은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주었다. 부설 허가조건에는 1년 이내에 착공할 것과 착공일로부터 3년 이내에 준공해야 한다는 단서가 있었다.

1897년 3월 28일까지는 착공해야 했지만 당시 모스는 자금난에 빠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설계상의 인천역 주변 부지는 일본인 소유자의 협조거부(요즘 말로 알박기)로 총체적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설권을 잃어버리기 6일 전에 출발지도 종착지도 아닌 우각동역 근처 쇠뿔고개에서 부랴부랴 치러낸 행사가 바로 경인철도 기공식이었다. 그리고 급히 마련한 행사의 기록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경인철도 설계도>

이후 1899년 9월 18일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의해 경인철도 일부 구간인 인천-노량진 간이 부분 개통했다. 이듬해인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가 완공되고 나서야 경인철도는 완전 개통되었다. 경성역에서 시작해 남대문, 용산, 노량진, 오류동, 소사, 부평, 우각동, 축현, 인천역까지 10개 역이 영업을 시작했다. 그해 9월 영등포역이 추가되어 모두 11개 역을 갖춘 후에야 완전개통을 축하하는 개통식이 열렸다.

<인천에서 열린 2차 경인철도 기공식>

실제 철도가 건설되는 과정에는 애초 계획했던 출발역, 도착역, 노선 등의 청사진이 바뀌는 경우가 잦다. 공사상 여건과 재정, 환경의 영향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외부적 조건 변화도 설계를 변경하게 한다.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행사가 중요한 이유이며 이 사진이 갖는 의미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기공식이 열린 우각동역은 다른 역들보다 규모나 교통지로서 중요한 거점은 아니었다.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이 가장 크게 전시되어 있는 곳은 철도박물관이다. 본관 입구에 들어서면 축소형 증기기관차와 함께 벽면을 가득 채운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오는데 갓을 쓴 조선인과 서양인, 그리고 연장을 든 작업자가 등장하는 이 사진이 바로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이다.

이 기공식 사진에 대한 기존 연구는 서양인과 우리나라 관리들과 노동자들과 군인들을 구분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행사에 참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알렌이나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이채연, 인천부윤(지금의 인천시장)이 참석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했다.

120여 년 묻혀있던 사진에 대한 비밀은 지금의 철도박물관장인 배은선 코레일 직원의 노력으로 밝혀졌다. 2019년 12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전차’ 특별전이 열렸다. 전차는 노면전차라 철도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평소 궤도교통기관에 관심이 많았던 배 관장은 전시의 내용 중에 ‘2017년 한국전력공사에 기증된 보스트윅의 유물’이라는 문장에 관심을 갖고 깊이 연구를 시작한다.

보스트윅(Harry Rice Bostwick)은 18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미국의 철도관련 기술자이다. 동료 기술자 콜브란(Collbran) 등과 국내에 전차를 부설하고 경인철도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물들이 후손들의 협조로 일부 공개되기도 했으며 최근 한국전력공사에 유물들을 기증했다. 고종이 전차부설을 위해 1898년에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한전의 뿌리로 유물을 적극적으로 인수할 수 있었다.

오래 전 시카고 한인회에 보스트윅 유물 공유를 문의한 적도 있던 배 관장은 한전 전기박물관 쪽과의 협의를 시작하고 전차와 철도관련 자료 스캔본을 제공받아 번역 및 분석해 그 결과물을 한전과 공유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나라 궤도교통의 효시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전체 2,238건의 자료를 추려 번역 의뢰하며 추리는 힘든 작업을 거치며 보스트윅이 갖고 있는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뒷면에서 행사 참석자에 대해 알 수 있었다. 120년이 넘도록 철도사에 드러나지 않았던, 경인철도 기공식 주요 참석자의 명단이 밝혀진 것이다.

<인물 설명과 함께 리터칭한 사진>

보스트윅의 사진 설명에 의하면, 1번은 기술자인 W. T. 칼리이며, 2번은 타운센드 회사의 D. W. 데쉴러, 3번은 인천의 무역업자인 W. D. 타운센드, 4번은 인천해관장인 프랑스인 M. 라포르트, 5번은 미국공사 알렌, 6번은 한성판윤 이채연, 7번은 인천부윤 이재정, 8번은 철도국장, 9번은 서울의 외채책임자, 10번은 한국군 지휘관, 11번은 보스트윅의 한국인 요리사, 그 옆의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은 일본인 공사감독으로 나와 있다. 보스트윅의 개인 요리사가 사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이 보스트윅일 거라고 배 관장은 추측한다.

오른쪽 팔을 가볍게 허리에 대고 있는 한성판윤 이채연, 그는 고종33년 6월 7일(양력 1896년 7월 17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임명된 철도관리였다. “농상공부 협판(지금의 차관) 이채연을 감독경인철도사무에 임명한다.”는 인사발령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그 옆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인물은 인천부윤 이재정이라고 적혀 있다. 이채연은 철도가 시작되는 수도 한성의 수장이자 경인철도사무 감독의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했으며, 이재정은 기공식 행사가 열리고 있는 인천지역 수장으로서 참석한 것이다.

참석자 명단에 주빈이어야 할 모스가 보이지 않는다. 고종에게서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은 모스(James R. Morse)는 기공식에서 핵심인물이다. 공사를 맡은 기술분야의 책임자 콜브란이나 보스트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발주자인 모스가 보이지 않고 알렌이 이채연 옆에서 주빈 노릇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모스는 이 중요한 행사를 놔두고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개통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모스가 당시 일본 요코하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경인철도 부설권 양도를 협의하고 있었다. 부설권을 반납해야 할 입장에 놓인 모스는 친구인 알렌에게 기공식 진행을 부탁하고, 자신은 일본에 가서 부설권 양도사업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의 제안을 받은 일본의 정‧재계는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구성하고 결국 모스로부터 부설권을 사들였다.

이 사진 한 장은 이 땅에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첫 공사인 동시에 철도의 부설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을 상징하고도 있다.

 

 

<한국철도의 유산 7. 코레일톡>

전 국민이 애용하는 열차 승차권 앱 ‘코레일톡’

다운로드 3천만 건…전체 승차권 발권량 80% 이상 담당

두꺼운 종이에서 ‘e-티켓’까지 기술발전과 함께한 승차권 진화는 진행 중

코레일 열차승차권을 예매‧발권하는 사람의 다섯 명 중에 네 명 넘게 ‘코레일톡’을 이용한다. 2010년 출시된 이후 누적 다운로드 수는 3천 만 건이다. 지난 한해 코레일톡으로 발권한 승차권은 130,737,000매로 전체 승차권 발권율의 80% 이상이 코레일톡을 이용했다. 공공기관 모바일 앱 다운로드 순위 1위, 생활여가 부문 1위에 선정되며 국내 대표 대중교통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열차 내 승차권 확인도 스마트폰을 꺼내 코레일톡을 보여주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스스로 좌석을 고르고, 예약하며, 지인에게 전달하고 일정에 맞춰 변경, 취소하는 것도 손안에 코레일톡으로 간편하게 진행된다.

출시 이후 코레일톡은 14년 간 진화를 거듭해왔다. △승차권 선물하기 △열차 출발 전 푸시 알림 △승무원호출 서비스콜 △범죄신고 △장애인 승하차 도우미 신청 등 맞춤형으로 서비스를 개선하며 출시 이후 1년 동안 10%였던 코레일톡 발권율을 8배 상승시켰다. 승차권발매에서 시작해 이제는 고객안전은 물론 숙박, 여행지입장권 등 여행상품 기능까지도 책임지고 있다.

전국에서 동일한 열차 좌석을 예매하기에 승차권 예‧발매 시스템은 전산시스템과 통신설비의 발전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코레일톡’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자가인쇄승차권’과 ‘문자승차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휴대폰과 PC에 최적화된 발권 시스템이었다. 과도기에는 통신사별로 휴대전화로 승차권을 예발매하는 모바일승차권(Mobile-Ticket)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철도 승차권의 변천>

1899년 철도창설 때부터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승차권은 두꺼운 직사각형 종이 행태의 ‘에드몬슨식’ 승차권이었다. 앞면에 출발역과 도착역·열차등급·운임 등을 인쇄하고 뒷면에는 승차권 일련번호가 찍혔다. 승차권 발매 시 승차 연월일을 날인했으며, 열차번호와 호차, 좌석번호는 매표를 하는 철도직원이 손으로 적었다.

여러 장이 마치 책처럼 묶여 있는 책자식(冊子式)의 승차권도 있었다. 차내 열차승무원이 발권하던 ‘대용(代用)승차권’에 쓰였다. 역 직원이 근무하지 않는 간이역에서 승차했거나 열차에서 승차권을 발행할 때 사용했다. 발권 시 빈칸을 승무원이 수기로 채워 발행되는 방식이었다. 한번 발행 시 승객용, 보존용, 보고용으로 세 개가 필요해 먹지를 갖고 다녔으며 이후에는 특수용지가 나왔다. 역에서도 책자식 승차권을 사용했는데, 정기승차권과 단체승차권에 도착역과 운임을 적어 판매했다.

에드몬슨식 승차권과 책자식 승차권 모두 위조와 변조를 막기 위한 지문(指紋)이 인쇄돼 있었다. 연속무늬로 되어 있는 이 지문에는 철도운영기관 명칭이 원형으로 들어가 있었고 열차종별(등급)에 따라 색상이 달랐다. 게다가 할인여부와 후급, 특실 등의 표기가 있어서 승차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마니아를 낳기도 했다.

오랜 시간 이어온 재래식 승차권에 변화를 가져온 건 1980년대 정보통신산업 육성과 컴퓨터 산업, 전자공업에 대한 기술이 발달하면서 통신기기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면서부터이다. 승차권에도 전산기술이 도입되었다.

<옛 서울역 매표창구>

<역에 보급된 전산발매기>

1981년 서울역을 비롯한 시범역 몇 곳에서 새마을호 승차권을 전산발매했다. 당시 새마을호가 우리나라 최고급 열차여서 최신기술도 새마을호에 우선 적용되었다. 1984년 전국 주요 역과 여행사에 전산발매기가 확대 설치되고 대상열차가 새마을호에서 경부·호남·전라·경전선의 무궁화호와 통일호에 이르기까지 모든 좌석지정열차로 확대되었다.

전국 모든 역에 전산설비가 개량되기 시작하면서 충북선, 장항선에 이어 중앙선과 경춘선, 태백선과 영동선까지 전국 모든 역에 전산발매기가 설치되어 전산승차권(지정공통승차권)이 발매된 것은 1988년에 이르러서였다.

전산발매라고는 하지만 승객이 직접 발권한 것은 아니다. 철도직원이 발매기에서 승차일시와 열차종별 등을 입력하면 발행 가능한 열차와 차실, 좌석현황 등이 모니터에 보이고, 특실이나 일반실, 매수 등을 선택해 모니터에 운임요금을 확인한 후 발권키를 누르면 전산용지에 도트프린터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승차권을 찍어냈다.

에드몬슨식 승차권의 경우엔 숙련된 직원이라고 해도 매일 마감을 할 때면 신경을 바짝 써야 했다. 승차권함의 수십 개 승차권마다 발매내역을 확인하고, 금액을 맞추고, 특수한 할인도 확인해야 했다. 보고를 위한 서류와 써야 하는 장부도 많았다.

매일 이런 업무가 반복되다가 키보드만 조작하면 출발역과 도착역에 따른 열차번호와 좌석번호, 운임요금이 모두 표시될 뿐만 아니라 마감도 전산으로 이뤄지니 천지개벽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승객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구간과 시간대만 말하면 모니터에 구입 가능한 열차와 좌석유무, 운임요금이 다 보이니 착오가 줄고, 부정의 여지와 좌석중복 염려도 없었다. 시간까지 절약되니 일석삼조였다.

전산발매에 의한 지정공통승차권도 한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발매 이후 표 확인이나 검표, 집표 과정에서는 에드몬슨식 승차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드몬슨식 승차권이 우리나라 철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고속철도 개통이 계기가 되었다.

2004년 4월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자성(磁性)승차권이 등장하면서 시스템에 다시 대변혁을 맞았다. 자성승차권은 승차권 용지 뒷면에 자성띠(Magnetic Stripe)를 입히고, 발행 시 각종 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의 승차권이다. 수도권전철 구간에서는 이미 1986년부터 역무자동화가 실시되어 자성승차권이 사용되었고 일반철도에서는 2004년 처음 사용되었다.

<2016년에 사용되던 서울역 승차권자동발매기>

자성승차권은 전산발매 기능뿐만 아니라 개집표 시스템과 연결되어 부정승차 단속, 통계자료 집계 등이 가능했다. 전국의 고속철도 정차역에는 자성승차권을 발권할 수 있는 장비와 전용 개집표기가 설치되었으며, 고속철도 개통일인 2004년 4월 1일을 기해 모든 에드몬슨식 승차권과 일반 책자식 승차권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자성승차권 발매시스템은 고가였기 때문에 모든 지정공통승차권 발매시스템을 대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작 자성승차권을 인식할 수 있는 자동개집표 시스템은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2009년 8월 3일 서울역을 시작으로 차례로 전국의 모든 개집표기가 철거되었다.

승차권의 진화가 급속도를 타기 시작한 것은 종이가 필요없는 e-티켓의 등장이다. e-티켓이라고 부르는, 역이나 여행사에서 발행하는 승차권이 아니라 예약된 승차권을 온라인을 통해 집에서 발권하는 ‘홈티켓(Home-Ticket)’, 예약정보가 입력된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SMS(Short Message Service) 승차권’ 등이 개발되어 신기술에 익숙한 고객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초기 홈티켓은 역이 아닌 곳에서도 승차권을 구입하는 시스템이었다. 집 근처 여행사나 은행, 우체국 등에서 승차권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철도승차권 판매대리점 시스템이 홈티켓의 원조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발전한 것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한 승차권 예약제도이다. 역이나 판매대리점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편히 철도승차권 예약이 가능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결제까지 가능한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2005년 4월 코레일은 고속철도 개통 1주년을 맞아 진정한 홈티켓 시스템을 선보인다. 예약 및 결제단계와 발권까지도 가능했다. 그 이전까지는 예약과 결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승차권을 직접 발권하기 위해서는 역이나 판매대리점, 혹은 자동발매기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홈티켓 시스템 덕분에 철도 이용자들은 기차표를 예약·결제한 후 컴퓨터의 프린터를 이용해 발권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자가발권승차권에 이어서 e-티켓의 하나로 2006년 9월 등장한 것이 바로‘SMS티켓’서비스이다. ‘SMS티켓’이란 휴대전화 문자서비스 기능을 활용한 것인데, 온 국민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시대가 옴으로써 가능해졌다.

e-티켓은 기차표를 편하게 구하는 차원을 넘어서 ‘종이 기차표’ 없이 기차를 타는 ‘티켓리스(Ticketless)’까지 이르렀다. ‘SMS티켓’ 서비스가 시작됨으로써 집에서 승차권을 발권하는 단계를 넘어 아예 발권이 필요 없는 승차권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스마트폰 대중화와 함께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한 승차권 예약발권서비스가 등장했다. 처음엔 ‘글로리코레일’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 12월부터 사용되다 2012년 11월 ‘코레일 톡(KORAIL Talk)’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존 e-티켓과 다른 점은 집이나 사무실 등의 고정된 장소가 아닌 모바일 환경에서 손쉽게 승차권을 예약·결제하고, 여행변경이나 반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인 스마트폰에 최적화되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자동개집표기 철거 결정에는 e-티켓 대중화에 대한 확신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열차승차권의 변천과정을 보면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다. 코레일톡의 기능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지만 5년 후엔 승차권이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지금과 같은 모바일환경을 누구도 몰랐듯이 말이다. 승차권은 이용자 편의를 위해 항상 진화하고 있다.

<승차권예매 외에도 다양한 서비스를 갖춘 코레일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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